율곡문화제는 파주의 자랑이신 율곡 선생을 위시로 한 선현들의 삶에 대한 '되돌아 봄'을 통해 오늘을 사는 지혜를 배우고 파주인으로서의 자긍심을 고취하며, 나아가 문화예술을 매개로 한 "함께 어우러짐"을 통해 역사적, 공간적 일체감을 나누며 즐기는 축제의 장(場)으로 자리잡아왔다.
주요 프로그램은 율곡선생의 얼을 기리는 추념 행사와 경축 행사로 대별되며, 추념행사로는 자운서원 추향제와 신사임당 추향제, 유가행렬 재연, 자운서원과 율곡이이 역사투어 등이 있다. 또한 율곡백일장 등 문예행사가 펼쳐지며, 전통혼례식, 역사뮤지컬 "율곡이이" 갈라쇼, 국악 및 판소리 공연 등 경축공연이 열리며, 각종 체험 프로그램들도 부대행사로 진행된다.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학자이자 경세가로 선대의 세거지인 파평면 율곡리에서 성장하였고, 법원읍 동문리 사적 제 525호인 파주이이 유적지에는 이이선생의 묘가 있다. 아명은 현룡, 자는 숙헌, 호는 율곡, 석담, 우재 본관은 덕수, 판관 의석의 증손이고 사헌부감찰 원수의 아들로 1536년(중종 31) 외가인 강릉 오죽헌에서 태어났다.
어머니인 신사임당이 율곡을 낳던 날 밤 꿈에 검은 용이 바다에서 침실로 날아와 아이를 안겨주는 것을 보았다 하여 어릴 때 이름을 현룡이라고 하였다. 산실은 몽룡실이라 하여 보물 제165호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그의 생애와 관련이 깊은 지역이 세 곳이 있는데, 첫째는 그가 태어난 외가가 있었던 강원도 강릉의 오죽헌이고, 둘째는 처가가 있었던 황해도 해주의 석담, 그리고 셋째는 덕수 이씨 가문의 세거지이면서 그가 성장했던 파주시 파평면 율곡리이다. 특히 그의 호 율곡은 파주의 율곡촌에서 유래된 것인 만큼 그의 생애에서 파주와의 관련성은 대단히 크다.
어려서부터 대단히 총명하여 이미 3세에 글을 읽었고, 1543년(중종 38)인 8세 때 "화석정시"와 1545년 10세 때 "경포대부"를 지었으며, 1548년(명종 3) 13세의 어린 나이로 진사초시에 합격하였다.
파평면 율곡리에 있는 화석정은 5대조인 강평공 명신이 1443년(세종 25)에 세운 뒤, 증조부인 의석이 증축하였는데, 율곡이 어린시절 학문을 익히고 관직에서 물러나 후진을 양성하던 곳으로 그의 학문과 사상의 형성에 중요한 장소가 되었다.
1551년 16세 때 모친상을 당하여 3년상을 치른 후 금강산에 들어가 불서를 연구하다가 1년 만에 하산하여 강릉 외가에서 '자경문'(스스로 경계하는 글)을 좌우명으로 삼고 공부에 전념하였다. 1557년(명종 12) 성주목사 노경린의 딸과 결혼하였고, 이듬해 당시 이름을 떨치던 성리학자 퇴계 이황을 경상북도 예안으로 찾아가 이기론에 관해 토론하였다.
당시 퇴계는 "후배가 두렵다는 말이 옛 말이 아니로구나."라고 하면서 그의 재능에 탄복하였다. 1561년 부친상을 당하고, 1564년 7월 생원시에 장원으로 합격한 후 이어 진사시에도 합격하였으며, 그해의 식년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구도장원공'(아홉 번 장원한 인물)이라고 일컬어졌다.
과거시험에서 율곡이 지은 "천도책"은 그 당시 시험관들로 하여금 경탄을 거듭하게 만들었다. 1564년 호조좌랑이 된 것을 시초로 1565년 예조좌랑, 이듬해 사간원정언. 이조좌랑을 역임하면서 마음을바로 하여 정치의 근본을 세울 것, 귀천을 가리지 말고 어진 이를 기용하여 조정을 맡길 것, 백성들을 편안케 하여 나라의 기반을 튼튼히 할 것 등을 상소하였다.
1568년(선조 1) 2월 사헌부지평을 거쳐 성균관 직강으로서 천추사의 서장관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온 뒤 다시 이조좌랑에 임명되었다. 그해에 우계 성혼과 '지선흥중'과 '안자격치성정지설'을 논하였으며, 11월에는 이조좌랑에 재임중 외조모 이씨의 병환이 위독하다고 하여 벼슬을 버리고 강릉으로 내려갔다.
이때 사간원에서는 외조모를 봉양하기 위해 벼슬을 버릴 수는 없다고 하여 파면함이 옳다고 탄핵하였지만, 선조는 "비록 외조모라도 정이 간절하면 어찌 안 가볼수 있겠는가. 효행한 일을 가지고 파직시킨다는 것은 지나치다."고 기각하였다. 선조는 1569년 6월 그를 홍문관교리에 임명하면서 이조에 명하기를 "외조모를 뵈러 가는 것이 비록 법전에는 없는 일이라 할지라도 특별히 이 사람만은 벼슬을 그대로 두고 왕래하도록 하라."고 지시할 정도로 그를 총애하였다. 같은 해 대표적인 시무책으로 알려진 "동호문답"을 저술하여 당시의 사회. 경제적 폐단을 개혁코자 하였다. 1570년10월 학문에 정진하기 위하여 관직을 사임하고 처가인 해주 석담으로 물러나와 문하생들과 더불어 경전을 강설하는 일을 낙으로 삼다가 이듬해 파주 율곡리로 돌아왔다.
그후 이조정랑. 의정부검상 등의 요직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해주에 있으면서 고산의 석담구곡을 찾아 풍류를 즐기면서 네번째 굽이의 이름을 송애라고 하고 기문을 짓는 한편, 거기에 집을 짓고 학문에 정진할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다. 1571년 6월 청주목사로 나가서 청주의 '서원향약'을 만들어 풍속 교화에 힘쓰다가 이듬해 3월 병으로 사직하고 파주 율곡리로 돌아왔다. 이때 우계와 이기, 사단칠정, 인심도심설 등을 논하였다.
1573년 7월 홍문관직제학에 임명되자 병으로 사직하고자 했으나 허락을 받지 못하고 귀경하여 세 번의 상소를 통하여 허가를 받아 8월 다시 파주 율곡리로 돌아가서 '감군은'이란 시를 지었다. 이때 어떤 사람이 "물러가려고 청해서 물러감을 얻었으니 무척이나 만족할 것이요. 그러나 저마다 모두 물러날 뜻을 가지면 누가 나라를 보살필 것이요."라고 하자, 율곡은 웃으면서 "만일 위로 대신으로부터 아래로 낮은 벼슬아치에 이르기까기 모두다 물러날 뜻을 가지기만 한다면 나라의 정세는 저절로 큰길을 가게 될 것이기 때문에나라를 유지 못할까 하는 것을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오."라고 응답하였다.
9월 다시 홍문관직제학에 임명된 후 곧이어 승정원동부승지로서 경연참찬관과 춘추관수찬관을 겸직하고, 이듬해 1월 우부승지로 승진하여 '만언봉사'를 올려, 정책을 세워도 백성을 구하는 실효가 없다는 등 7가지 시폐를 지적하고 재앙을 막아낼 계책과 진덕하는 공을 말하였다. 1574년 3월 사간원대사간을 지낸 후 10월 황해도관찰사로 나갔다가 이듬해 3월 병으로 다시 사직하고 파주로 내려갔다. 그해 가을 옛 성현의 말 가운데 학문과 정치에 귀감이 될 구절들을 모아 '성학집요'를 편찬하였다. 1577년 해주 석담을 내려가 생활하면서 '격몽요결'을 저술하고, '해주향약'을 만들어 마을의 폐습을 바로잡았으며 사창제도를 실시하여 가난한 백성들을 구제하였다. 특히 초학자를 위한 입문서의 성격을 갖고 있는 격몽요결은 실제 생활을 토대로 하는 실천철학서이며 교육입문서로서 조선사회에서 '소학' 다음으로 가장 많이 읽혀진 서책중의 하나였다. 애매하고 몽매한 것은 쳐서 없앤다는 제목처럼 격몽요결은 성리학을 바탕으로 충. 효.학. 행을 강조하며, 일상생활에서 도리를 터득하여 실천하려는 목적으로 저술된 것이었다. 1583년에는 시국에 대한 '육조계'를 올려 당시의 여러 폐단을 시정코자 하였다.
그 내용은 불필요한 관직을 없앨 것, 지방의 여러 고을을 병합하여 행정을 간소화할 것, 생산을 장려할 것, 황무지를 개간할 것, 백성들에게 과중한 부담이 되는 공납에 대한 법규를 개정할 것, 공사노비들에게도 속량할 수 있는 기회를 줄 것, 성곽을 보수할 것, 군인의 명부를 정확히 파악하고 기재할 것 등으로 사회개혁을 통해 국가와 민생의 안전을 추구하였다.
또한 이때 선조에게 "지금 나라의 기세가 떨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10년 안에 반드시 나라가 무너지는 큰 화를 만나기가 쉬울 것이니, 10만 명의 병사를 기르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라고 상소하여 10만양병설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 무렵 동인들로부터 탄핵을 받고 사직하게 되었다. 그 당시 활 잘 쏘는 사람을 뽑아 북방의전쟁터로 보낼 때에 군마가 부족하여 말을 바치는 노약자에게 군역을 면제해 주는 제도를 마련하였다. 이것은 말을 준비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당시의 탄핵 내용은 그같은 일을 임금의 재가없이 함부로 했다는 것과, 그가 임금의 부름을 받고 입궐할 적에 누적된 피로로 승정원에 이르지 못하고 병조로 들어가 누워있었는데 그것은 율곡이 권력을 잡아 교만해진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이때 박순과 성혼이 상소하여 변호했으나 양사에서 합동으로 다시 탄핵하자 태학생 및 호남과 호서의 유생 800여 명이 그 부당함을 극력 상소하여 오히려 동인의 박근원 등이 유배되었다. 그의 정치이념의 기초는 왕도정치, 인정에서 출발하는 애민정치였다. 그는 만언봉사에서 "옛날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변할 수 없는 것은 왕도이며 인정이다."라고 하면서 "임금은 나라에 의거하고 나라는 백성에게 의거한다. 백관을 창설하고 여러 직책으로 가른 것은 오직 민생을 위해서이다."라고 하여 민본정치를 추구하였다. 이러한 관점에서 봉건적 모순과 폐해를 비판하고 개혁할 것을 적극적으로 주장하였다. 그는 1569년 저술한 동호문답의 '논안민4년에 상소한 만언봉사에서도 상하가 서로 믿는 성실이 없는 것과, 신하들이 일을 책임지는 성실이 없는 것 등 7가지의 병폐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율곡은 이러한 폐단이 만연된 당시의 사회를 변법사상에 기초하여 개혁하고자 하였다. 법의 개정에 반대하는 당시의 보수적 집권층과는 달리 시대의 상황에 따른 법의 역사성을 강조하였다. 어떠한 제도라도 오래 지나면 폐단이 일어나게 마련이며 조정의 성법이라도 폐단이 생기면 고치는 것이 당연하다는 입장이었다. 또한 정치는 시의를 반영하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에 당시의 상황에 따라 시의적절한 제도를 새로 마련하여 백성을 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그는 시대에 따라 마땅히 행해야 할 일을 창업과 수성, 그리고 경장의 과정으로 나누어 논하면서 당시의 사회를 경장기로 보았다.
민생의 어려움이 극에 달해 있는 당시에 상황을 직시하였으며 변법과 개혁을 통해 국가의 쇄락을 막을 것을 주장하였다. 구체적으로 그는 변법사상에 기초하여 조세법. 공물법. 노비법. 적서차별법 등의 각종 법규를 실정에 맞게 고칠 것을 내세웠다. 이이의 사회. 정치적 견해에서 중요한 것은 국방론이다. 집권통치자들이 태평성세만을 노래하면서 국방에는 전혀 관심을 돌리지 않고 있는 당시의 형편을 통탄하는 동시에 적극적인 국방론을 제기하였다.
그는 국방을 강화하기 위한 선결조건으로 백성들의 생활을 안착시키는 것을 내세웠다. 또한 유사시에 대비하여 10만양병설을 주장하였다. 그는 당시의 국제정세를 볼 때 우리나라의 세력이 매우 약하여 10년 이내에 국가에 화가 있을 것을 예측하였다. 따라서 미리 10만 명의 군사를 양성하여 서울에 2만, 각 도에 1만 명씩 배치하되 군사에게는 호별세를 면해주고 무술을 단련시키며 6개월 만에 교대로 서울을 지키도록 하다가 변란이 일어날 때는 10만 명을 합쳐서 지키게 하는 등 위급한 때와 그렇지 않을 때를 위한 대비책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율곡의 10만양병설에 대하여 유성룡 등은 태평한 시대에 병사를 기르는 것은 화를 자초하는 것이라는 이유로 반대하였지만, 10만양병설이 제기된후 8년 만에 임진왜란이 일어나니 율곡의 뛰어난 식견과 예지에 감탄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율곡은 조선 시대 대표적인 성리학자일 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전반에 걸쳐 개혁을 주장한 대표적인 정치개혁가였다. 대동법의 실시, 사창의 설치 등 사회정책에 대한 획기적인 선견을 제시하기도한 그의 시무논적 경향은 조선 후기 실학자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저술로는 '성학집요', '격몽요결', '소학집주개본', '중용토석'등과 이를 집대성한 '율곡전서'가 있다. 글씨와 그림에도 뛰어났다고 한다. 선조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해주 석담의 소현서원, 법원읍 동문리의 자운서원, 강릉의 송담서원, 풍덕의 구암서원, 서흥의 화곡서원, 함흥의 운전서원 등 전국 20여 개 서원에 제향 되었다. 1624년(인조 2) 문성이란 시호가 내려졌고, 1681년(숙종 7) 문묘에 종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