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계 박세채
소개
박세채(朴世采 1631-1695)는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1631년(인조9) 출생했다.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화숙(和叔), 호는 현석(玄石)·남계(南溪)이다. 호의 하나인 남계는 지금의 광탄면 창만리 마을 앞을 흐르는 개울로, 박세채는 만년을 이곳에서 지낸 것으로 보인다. 아버지는 홍문관교리 의이며 어머니는 신흠(申欽)의 딸이다. 그의 가계는 명문세족으로, 증조부 응복(應福)은 대사헌, 할아버지 동량(東亮)은 형조판서, 『사변록思辨錄』을 저술한 박세당과 박태유, 박태보 등은 박세채와 당내간의 혈족이다. 또한 송시열의 손자 순석(淳錫)은 그의 사위이다. 그는 이러한 가계를 배경으로 중요 관직에 나아가 정치에 참여하였다. 1638(인조16) 7세의 어린나이에 아버지로부터 가학(家學)을 전수받고 1649년에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 들어갔으나 성균관 생활 1년 만에 과거공부를 포기하였다. 그는 원래 율곡의 『격몽요결擊蒙要訣』로써 학문을 출발하였으며, 율곡을 매우 존경하였다. 그 무렵 율곡 이이, 우계 성혼의 문묘종사 문제가 제기되었다. 당시에 영남유생 유직(柳稷)이 이들의 문묘종사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박세체는 유직의 상소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글을 내었는데, 이에 대한 효종의 비답(批答)속에 선비를 몹시 박대하는 글이 있어 이에 분개하여 과거시험의 뜻을 버리고 학문에만 전념할 것을 결심하게 되었다. 1651년에는 김상헌(金尙憲)과 김집(金集)에게서 배웠는데, 그의 큰아버지 호(濠), 종부 미(彌), 그리고 아버지가 일찍이 김장생의 문하에서수학한 것을 연유로 하여 그의 사승관계(師承關係)도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1659년 봄에 천거로 익위사세마(翊衛司洗馬)가 되었는데, 5월에 마침내 효종이 승하하여 자의대비의 복상문제가 크게 거론되자 그는 3년설을 주장한 남인계열의 대비복제설을 반대하고 송시열, 송준길의 기년석(朞年設)을 지지하여 서인 측의 이론가적 인물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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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재지 : 광탄면 만장산로 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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